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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시선: 김보희 “the Days” 후기

KIM BOHIE 김보희 “the Days”
2022.08.09-10.30
제주현대미술관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낯선 환경에서 평소 잊고 지내는 다양한 감각을 깨운다는 사실이다. 익숙한 풍경에서 그냥 지나치던 것들도 새삼스럽게 자세히 보고 관찰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새로운 음식으로 미각을 깨우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도시에 살던 사람이 자연 속으로 가면 새 지저귀는 소리, 풀잎 부딪히는 소리, 바람 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되고 공기에 실려오는 다양한 향기를 맡는다. 피부로 공기를 느끼고, 계절 감각을 깨워주는 여행. 아마도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감각할 수 있는 동력은 생활 전선을 뒤로하고 떠난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마음의 여유인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여행 온 듯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김보희 개인전 <the Days>(2022.08.09-10.30) 관람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미술관에 펼쳐진 한 점 한 점의 그림이 일상의 근심들과 잠시 거리두기를 돕는다. 세심한 관찰을 바탕에 둔 작가만의 정돈된 표현이 고요하다. 제주 바다, 중문동의 어느 거리, 작업실의 정원, 산책로 등 화폭에 담긴 작가의 일상이 여행자의 시선과 닮았다. 일상을 여행 온 듯이 사는 사람이 바로 예술가인가 보다.

▲ 김보희 개인전 <the Days>(제주현대미술관, 2022.08.09-10.30) 전시장 풍경 2022.08.23 ©박민희

김보희의 풍경에는 그림자가 없다. 작가만의 독특한 정서를 형성하는 부분인데,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시대 예술에서 동양과 서양을 구분 짓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회화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만큼 지역마다 오랜 전통이 존재한다. 과거 한자 문화권에서는 정신과 기운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화폭에 담는 대상의 변하지 않는 본질과 기운을 담은 그림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매우 추상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조선 회화에서 보이는 산과 나무 등의 자연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일정 부분 추상화, 도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이 공기 원근법과 명암을 바탕에 둔 유럽의 전통 회화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원근에 따른 크기와 채도의 차이, 빛에 따라 변화하는 명암 등 눈으로 보는 것과 흡사하게 화폭을 채운 그림이 소위 ‘서양화’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김보희의 그림을 독특하게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도권 교육과 사회에서 접하는 미술은 ‘서양화’의 비중이 더 큰 탓에, 동양 회화의 특징이 반영된 김보희의 그림이 어딘가 모르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보희의 그림을 ‘동양화’로 구분 짓기도 어렵다. 먹의 농담과 집중력, 필력, 선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표현 기법에서는 벗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디자인, 일러스트와 같은 성격도 다분하다. 때문에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보여 준다는 평가가 많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양화’를 전공하고 학생들을 가르친 오랜 경력을 바탕으로 동서양의 구분을 벗어난 김보희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김보희의 작품 ‘향하여(Towards)’를 배경으로 환담하고 있다. 출처_연합뉴스

김보희 작가는 지난 2017년 미국 대통령 한국 방문 당시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 걸린 작품으로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2020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최한 김보희 개인전 <Towards>는 금호미술관 30여년 역사상 국내 생존 작가 개인전으로 최다 관람객을 동원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방문객은 평소의 10배 이상이었고, 미술관 입구에 방문객들이 3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고. 이에 미술관 측에서는 구상 미술에 대한 수요층이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방탄소년단 RM이 전시를 다녀 간 후 작품 앞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 홍보가 톡톡히 된 이유도 있다. 더불어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자연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와중에 김보희의 작품이 시의적절했던 것이다. 작품을 보며 위로를 받았다는 관람 후기가 많다. 올해 제주현대미술관 전시 또한 개막과 동시에 하루 평균 1천명 이상이 다녀가며 성황을 이루고 있다.
2017년은 작가의 교수직 임기가 끝나고 제주로 이주한 해이기도 하다. 신혼여행으로 처음 방문했던 제주의 풍광에 매료되어 ‘노후는 제주에서 살자’ 다짐했고, 2000년대 초 계획을 앞당겨 서귀포시 중문 인근에 작업실을 겸한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남편이 먼저 이주했고, 김보희 작가는 약 20여년간 제주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 퇴직 후 온전히 정착했다. 종이와 캔버스, 분채와 아크릴을 오가며 작품의 크기와 재료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김보희가 조명하는 생명의 세계는 평화롭다. 정갈하고, 고요하다. 작가는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제주도를 왕래하기 이전에 수묵화를 즐겨 그렸지만, 사계절 내내 푸른 제주의 자연과 생명력에 고마움과 신비로움을 느껴 녹색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평생의 일상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풍경은 말그대로 작가의 일상이다. 20여년 간 부부가 함께 공들여 가꾼 아름다운 정원, 아침마다 커피 한 잔 마시는 테라스, 반려견 레오. 집 근처를 산책하며 마주하는 빛이 고운 노을, 밝은 달, 맑은 공기. 언제나 휴대폰 카메라로는 담은 수 없었던 그 풍경들이 고스란히 화폭에 담겨 관람자의 마음까지 닿는다.
사실 제주의 자연이 언제나 정갈한 것은 아니다. 흐린 날도 많고, 거센 파도 치는 날도 많다. 그 바람에, 그 태풍에, 그 바다, 그 숲에 얼마나 다사다난한 삶이 깃들어 있는가. 하지만 작가가 선택한 세계는 아주 잔잔한 바다. 투명하게 빛나는, 해가 담긴 성스러운 바다. 비바람이 잦아든 싱그러운 정원. 아침의 상쾌함과 커피 한 잔의 여유다. 아마도 그 순간의 풍경들은, 수많은 주저앉은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 그 풍경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 동기는 간단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이 관객들의 마음에 닿아 삶의 위로가 되고 있다.

참고
KBS제주, 문화스케치 “자연에 비친 마음의 풍경 – 화가 김보희”(2022.09.19 방송)
제주현대미술관, “the Days_김보희 작가_Full 영상”(2022.08.08)
H아트랩, “(LECTURE) 만나고 싶은 작가 [김보희의 작업 세계]”(2021.07.26)
마크 테토, 「김보희 작가의 터치로 태어난 제주」, 『Living Sense 2021년 6월호』
디자인하우스, 「화가 김보희 – 자연으로 초대」, 『행복이가득한집 2020년 8월호』
서울경제, “김보희가 호크니야? 왜 이렇게 줄을 서?”(2020.07.11 조상인 기자)
서울경제, “[단독] 트럼프 맞아 청와대가 공수해 건 그림은?”(2017.11.07 조상인 기자)

박민희 | 시각예술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 읽기에 흥미를 갖고 독립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