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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전시

제주도는 지금, 기후미술관

2022년 11월 제주도 전시 스케치

미술관은 조용한 공간이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소리가, 세상의 소리가 보인다. 동시대미술은 감각으로 소통하는 것을 넘어 지적 탐구와 희열을 나누는 장으로서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사회적 목소리를 높이고 여론을 형성하는 직접 정치의 현장은 아니지만 은폐된 진실이나 암묵적 금기,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재료 삼아 당대의 성찰 과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것이 미술인가? 그렇다. 이것이 동시대의 전선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이자 그것을 나누는 방식이다.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서 미술 작품을 마주하고, 사회의 공익과 발전을 위해 미술관을 운영하는 것이 학예사들의 사명임을 돌이켜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최근 제주도내의 미술 전시는 각각이 모두 연결된 하나의 행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통일성 있는 큰 주제를 내포하게 되었다. 바로 기후. 이는 제주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주제다. 특히 제주도는 천혜의 자연 환경 덕분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예술가들에게 사랑받아왔다. 바다에서 오름에서 정신없이 마파람을 맞으며 몸으로 기후를 감각하는 곳, 곶자왈에서 태곳적 공기를 마실 수 있고 지하에서 뽑아 올린 샘물을 일상적으로 마시는 곳. 흥미롭게도 기후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지금의 시대정신은, 원시적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제주의 자연 환경을 미디어에 담기만 해도 생태미술로 수용한다. 제주도는 지금, 자연 환경 생태 기후 등의 키워드를 작품에 담은 전시장 안과 기후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전시장 밖까지 온통 기후미술관이다.

제3회 제주비엔날레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2022.11.16-2023.02.12)

11월 16일, 제3회 제주비엔날레가 개막했다. 달과 땅, 이 두 개의 단어에 제주 땅의 역사와 신화, 생명의 순환,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사색을 담았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 옛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소환하여 현재에 대한 성찰을 독려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섬사람들은 예부터 바람이 불면 낮게 엎드렸다. 바람을 거스르고 더 멀리, 더 높이 하늘에 닿으려는 욕망이 왜 없었겠는가. 바람에 맞서기 보다는 옴팡진 곳에 집을 짓고, 자연 속 궤(구멍, 동굴)에 좌정한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며 더불어 사는 것이 이 땅의 사람들이 터득한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위해 사용되었던 신성한 주술품들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채 박물관에 박제되고, 미술사의 첫 쪽을 장식하게 된 것은 인간이 자연에 도전하는‘현대 문명’의 탄생이자 ‘미술’의 탄생, 어쩌면 비극의 시작이다. 제3회 제주비엔날레는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현대미술관 뿐만 아니라 4개의 위성전시관(삼성혈, 가파도 AiR, 제주국제평화센터, 미술관옆집 제주)을 통해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과 관념에 대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전시장 안과 밖을 모두 거닐어야 한다. 16개국 55명/팀의 작품 165점. 총 6개의 전시 장소는 주로 제주도 서쪽에 분포되어 있고, 내년 2월까지 개최된다. 위성전시관에서는 티켓을 살 수 없으니 주제관을 먼저 방문하기를 권한다. 탐라건국신화의 신체(神體)라고 할 수 있는 삼성혈은 제주국제공항에서 15분 거리에 있고, 제주시내 한 가운데에 있어 관광객 그리고 도민들에게도 접근성이 좋다.

제26회 제주미술제 특별전 《기후 제주》(2022.11.04-11.27)

지난 11월 산지천갤러리에서는 제26회 제주미술제 특별전 《기후 제주》가 열렸다. 전면에 내세운 제목처럼 기후 변화와 위기에 대한 담론을 다뤘다. 본 전시에서는 젊은 작가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특유의 정서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박주우는 제27회 제주4⋅3미술제에서 <피를 마시는 꽃>(2020)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는데 동백꽃이 아닌 청미래덩굴이라는 새로운 상징을 사용한 것이 흥미로워서 기억에 남아있는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립>(2018)을 볼 수 있었는데, 문명의 잔해들이 바다 한가운데 쌓여 고립되어 있는 장면을 표현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연출된 가상의 세계이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맞닥뜨리게 될 풍경일지도 모른다. 김승민 작가의 작품 <끝없는 불길 속에 우리는>(2022)도 눈길을 끈다. 심해와 같은 깊은 동굴 속에서 문명은 불타오른다. 공룡 화석과 같은 대형 뼈가 화폭을 가로지르며 놓여있는 낯선 환경이지만 석고상과 항아리, 화분 등 일상적 사물들이 곳곳에 놓여있고 등장 인물은 태연하게 반려견과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까. 불기운 마저 적응해 버린 것일까. 새탕라움에서 첫 개인전 《열매가 맺히는 곳》(2021)을 개최한 함현영의 다양한 열매들도 볼 수 있었다. 함현영은 실제로는 볼 수 없는 개인의 정체성을 가상의 열매로 시각화한다. 각자가 나고 자란 환경을 자양분으로 생성된 열매들은 저마다의 색과 형태를 갖는다. 이는 자연 환경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대한 고찰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2022 예술공간이아레지던시입주작가결과보고전《온전한조각》(2022.11.05-11.20)

예술공간이아 갤러리에서 볼 수 있었던 《온전한 조각》또한 기후, 제주를 관통하고 있다. 특히 박한나의 다큐멘터리 <보말, 노루, 비자나무, 사람>(2022)은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적 대응과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제3회 제주비엔날레《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은 대자연의 생명력과 경이로움 그리고 인류의 오랜 역사를 단숨에 꿰는 신화를 매개로 성찰을 독려하는 반면, 제26회 제주미술제 특별전 《기후 제주》는 예술의 상상력을 통해 근미래의 위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즉각적인 실천과 각성을 촉구하고 있었다. 《온전한 조각》에서 기후 위기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작가는 한 명 뿐이었지만, 난개발로 빠르게 변화해가는 제주의 현실과 생활 속 관계망에 대한 이야기들은 생태적 관점으로 해석 가능하다.

박한나의 <보말, 노말, 비자나무, 사람>(2022)

홍진숙 개인전 《곶자왈의 숨, 용천수의 꿈》(2022.11.23-2023.01.29)

앞서 언급한 《온전한 조각》에서 일부 소개되었던 홍진숙의 작품들은 제주돌문화공원에서 대규모로 전시 중이다. 작가는 제주도 곳곳을 직접 답사하고 물의 역사를 탐구하며 64점의 회화를 완성했다.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제주도는 현무암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물을 머금지 못한다. 때문에 논농사가 어렵고, 물이 귀했다. 지하로 빠져버린 물은 해안가에서 다시 솟아 났는데, 이를 용천수(湧泉水)라고 불렀다. 제주의 많은 마을들은 식수원이었던 용천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마치 함현영의 열매처럼 같은 형태가 단 하나도 없는 제주의 용천수. 하지만 상수도 개발 등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매립되거나 쓰레기와 함께 방치되어 사라져가고 있다. 곶자왈도 마찬가지다. 홍진숙은 제주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용천수와 곶자왈을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작품에 매진했다. 제주도 물정책과에 따르면 현재 661개의 용천수가 존재하지만 쓸모를 잃은 용천수는 461개에 달한다. 상수도가 개발되기 시작한 1953년 이후, 수천년 동안 이 땅의 사람들에게 생명수였던 용천수의 용도 폐기는 불과 70년 안팎에 벌어진 일이다. 《곶자왈의 숨, 용천수의 꿈》은 홍진숙의 성실한 학습 노트이면서 동시에 주술이다. 그의 작품들이 피바디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제물들처럼 박제되기 전에 영험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2022 할머니의 예술 창고 9명의 제주 할망 그림 전시회 《할망해방일지》(11월 매주 토요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마을에서 진행된 《할망해방일지》는 나이 여든이 넘어 처음으로 그림을 배운 할머니들의 그림 전시이자 최소연 작가의 프로젝트 예술이었다. 11월 한 달 동안 할머니들의 집 마당과 소막, 창고 등을 개방해 매주 토요일에만 관객을 맞았다. 전시를 볼 수 있는 날은 4일 뿐이었지만 그 잔상과 여운이 오래 남는다. 서툰 그림과 한 줄 문구에 담긴 삶의 진솔함이 마음을 파고든 때문이다. 생태예술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연결과 순환의 감각을 할머니를 통해 표현했다.

 제주목관아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올해 3월 개관)에서는 최근 이지유 개인전 《The Vessel》(2022.11.16~11.30)이 개최되었다. 이는 재일제주인 1세대의 목소리를 전하는 전시로서 제주 사회의 역사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을 바탕에 두고 있다. 고립이 아닌 연결, 공동체에 대한 환기야 말로 기후미술관이 필요한 이유다.

이 외에도 소개하지 못한 작품과 전시가 수두룩하다. 제주도 구석구석 존재하는 복합문화공간과 갤러리에서, 동네 카페에서, 작은 책방에서 크고 작은 미술 사건들이 벌어진다. 기후 위기, 머리로 알고 있지만 마음이 뜨겁지 않다면 몸을 먼저 움직여보자. 제주 곳곳의 전시장 안팎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분명,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작품의 소리가, 마음을 두드리는 세상의 이야기가 보일 것이다.

기후미술관: 2021년 국내 미술계에서는 기후와 환경, 인류세, 지속가능성 등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가 연달아 개최되었다. 현재에도 그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그 내용과 과정을 미술계에서 소화하는 방식이기도 했고, 미술관이 진보적 담론을 다루는 장이지만 구체적 실천이 없다는 자조적인 비판에 대응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2021년 6월 8일부터 8월 8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기후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공공예술사업으로 진행된 《기후미술관: 우리 집의 생애》는 한 국가의 인구 3.5%가 행동하면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는 에리카 체노워스(Erica Chenoweth)의 연구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되었다.

※ 본 글은 제주문화예술재단 계간지 『삶과 문화』(2022 가을・겨울 통권 83호)에 수록된 글입니다.

박민희 | 시각예술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 읽기에 흥미를 갖고 독립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