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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 ‘선자’들 1: 소설 파친코와 드라마 파친코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드라마로 객관화되어 눈 앞에 나타났을 때, 독자로서 기분은 꽤 복잡하다. 나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짐작해보았던 그 사람과 드라마 속 그 사람의 차이 때문이다. 국내에서 소설 파친코를 번역 유통한 문학사상 판권이 종료되는 시점(2022년 4월)에 30만부 정도 판매되었다고 하니, 최소 30만 명의 가상의 ‘선자’ 혹은 어머니가 투영된 ‘선자’ 그러니까 저마다의 ‘선자’가 존재했을 터. 하지만 드라마가 방영된 후부터 ‘선자’는 배우 윤여정과 김민하 그리고 김보민으로 상상될 것이다. 흐릿했던 영상이 선명해지고, 상상해보지 않았던 부분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 알게 되는 일, 설득되는 일은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시각과 저마다의 상상이 객관화되는 것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파친코의 흥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왜 파친코에 열광할까. 이 정도면 파친코를 제대로 읽은 걸까. 아주 개인적인 호기심 해소와 더불어 이전에 미처 예민하게 감각하지 못했던 국민 국가의 경계를 확인하고 싶은, 결국 미완성일 수밖에 없을 탐구의 시작점으로 글을 쓴다.

재일조선인

드라마에는 소설에 없는 장면 몇 개가 공들여 창작되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시즌1, 4장과 7장에 나온다. 4장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젊은 선자가 백이삭(배우 노상현 역)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는 내용과 1989년 그들의 손자 백솔로몬(배우 진하 역)이 회사의 중요한 계약을 추진하는 내용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1933년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는 선자와 이삭 뿐만 아니라 조선인 여가수도 함께 탑승했는데, 그녀는 일본인으로 가득 찬 일등석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도중, 예정에 없던 판소리를 불러 좌중을 당황케 하고 자살한다. 1989년의 솔로몬은 회사의 중요한 계약, 조선 출신의 할머니로부터 토지 매입 계약을 하는 자리에서 결국 “하지마세요.”라고 말한다. 돈과 성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솔로몬은 평소답지 않은 행동, 자신과 회사의 이익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뒤 알 수 없는 해방감에 휩싸여 비를 맞으며 춤을 춘다. 솔로몬은 자신이 근무하던 빌딩 고층에서 아래로, 아래로 끊임없이 계단을 내려오며 명품 넥타이와 자켓을 벗어 던진다. 그간의 노력으로 어렵게 획득했을 사회적 지위와 부, 체면을 모두 내동댕이치고 빗속으로 뛰어 들어 비로소 활짝 웃는 것이다. 이렇게 계약이 파기되기 전, 할머니가 솔로몬에게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바퀴벌레’라고 불렀지. 땅 속에 다시 처박아야 된다면서. 잘 생각해봐. 그게 너한테 하는 얘기니까. 어디 들어보자. 네 할머니가 저 희죽대는 면상들 쳐다보며 여기 앉아 계시는데, 그 몸 속에 한 맺힌 피가 그 핏방울 하나 하나가 이걸 못하게 막는다면 뭐라 말씀드릴거야? 그래도 사인하라고 하겠니?”

애플TV 드라마 파친코 4장 중

드라마 파친코 기획/제작자의 의도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장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성적 대상화되었던 여가수의 자살은 소설에 전혀 없는 장면이고, 솔로몬의 계약 장면은 각색되었다. 소설에서 솔로몬은 계약을 성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측의 ‘파친코와 관계된 재일조선인은 모두 야쿠자(범죄/폭력 조직)’라는 터무니없는 편견과 억측으로 부당해고를 당한다. 드라마 4장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50년만에 고향(부산 영도)을 찾은 선자가 호텔로 가는 택시를 갑자기 멈추고 비가 내리는 밤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솔로몬과 선자가 빗속에서 느끼는 해방감은 어떤 것이었을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유인가.

한 사람의 인생에는 무궁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지만 일상적 노력으로 절대 바꿀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인종과 모어, 생김새, 장애, 부모, 유년기의 가정환경과 같은 것들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혐오와 차별 편견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 폭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숨겨야 하는 삶.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 남은 조선 사람들이 감당해야했던 삶은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그것이었다. 아니, 한층 더 복잡하다. 모어와 모국어의 불일치, 가족 문화와 사회 문화의 불일치, 본질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불일치, 정체성의 혼란, 제도적 차별, 거침없는 혐오와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스스로를 숨기고 조용하게 살아가거나, 제국주의 식민지 역사의 증인으로 선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부조리에 맞서 싸우거나.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 일본인이 멸시하는 노동을 수행하며 문제적 존재로 주목받지 않도록 각별히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단지 나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일, 일본 사회 속에 존재하는 조선 사람으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유일한 길이 차별 속으로, 그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맞서 싸우는 것 뿐이라니.
재일조선인 1세대라고 볼 수 있는 극중 ‘선자’는 새벽부터 새벽까지, 생존을 위해 중노동을 감내한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 전쟁, 분단, 해방 시대의 등쌀에 떠밀렸지만 자신의 두 아들, 백노아(드라마에서 노아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시즌2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로 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와 백모자수(배우 박소희 역) 만큼은 인생에 더 많은 선택지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며 그들 뒷바라지에 평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첫째 아들 노아는 명석했고 실력이 뛰어났다. 노아는 학교에서 인정받고, 일본 사회에 순/적응해 나갈수록 진심으로 일본인이 되고 싶었다. 노아 인생의 마지막 선택은, 자신의 존재를 끝내 긍정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준다. 일본 사회에 뿌리내린 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그 자신에게도 내면화되었다. 부모와 자기 자신을 독립된 별개의 인격체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본인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을 자신의 한계로 설정해둔 채. ‘피가 더럽다’는 터무니없는 한 문장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선자의 둘째 아들 모자수는 종종 부조리에 맞서 싸우면서, 스스로를 긍정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이 부조리는 차별로 피해를 입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을 가하는 상대의 문제라는 것을 안다. 끊임없이 폭력적인 환경의 학교를 그만두고 파친코 게임장에서 일하는 길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자신을 긍정해주는 사람들 곁에 있었고, 일터에서는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재일조선인 3세인 솔로몬,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풍요로운 경제적 지원 속에서 실력을 쌓으며, 차별에 무감각한 인물로 성장했다. 파친코 게임장 운영은 야쿠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부당한 일반화의 편견, 그리고 아버지의 경제적 성공이 그를 지켜주었다. 그러니까 힘과 돈. 폭력적 현실 속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은 역시 폭력 그리고 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도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회사의 계약이 파기된 순간(드라마) 혹은 부당해고를 당한 순간(소설)에 처음으로 ‘자이니치(在日, 재일조선인의 멸칭)’라는, 차별 당하는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내가 사는 곳이나 국적쯤 돈만 있으면 어디든지,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자본주의 현대사회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체제를 상상한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폭력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그 존재 자체로 무언가 증언하고 있다. 역사가 망친, 역사에서 버려진, 역사가 외면한 사람들. 1천억 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규모 프로젝트, 세계를 겨냥한 콘텐츠 시장에서 동아시아의 현재 진행형 제국주의 식민주의 냉전을 증언하는 재일조선인의 이야기가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고한수’와 ‘백이삭’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선자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존엄이나 권리를 주장하거나, 부당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문제제기 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그저 최선을 다해 가족들의 끼니를 챙기며 살아간다. 선자는 그 어떤 상황도 이념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녀의 삶에 존재했던 두 명의 남자, 고한수(배우 이민호 역)와 백이삭이 그것을 보여 준다.
명확히 따지자면 고한수는 일제 부역자로서 일본인으로 살아남은 야쿠자였다. 그에게는 조국도, 신념도 없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권력과 돈을 추구했다. 반면 백이삭은 노동 인권 운동을 했던 기독교인이자 사회주의자다. 그의 첫째 형은 3.1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요절한 독립운동가였고, 그는 첫째 형을 존경했다. 조선의 봉건사회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박애를 추구했던 기독교는 평등한 인간으로 존중 받고자 했던 사람들의 학교이자, 운동 조직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천황제 때문에 기독교를 탄압했다. 소설에서 백이삭은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과 함께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노아가 여덟 살 때 결국 죽음에 이른다. 만약 백이삭이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해방과 분단 이후에 고향 평양으로 돌아갈 순 없었을 것이다. 고한수와 백이삭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선택을 했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선자의 인생에는 그 둘이 모두 존재했다. 선자는 고한수의 아이(노아)를 임신하고 그가 유부남인 것을 알았을 때 수치심과 절망을 느꼈지만, 백이삭이 그 모든 것을 품어 주었을 때 구원받았다고 느낀다. 백이삭의 종교나 사상, 어머니와 고향을 떠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조선 땅에서 첩으로 사는 것 혹은 미혼모로 사는 것이 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선자는 이삭의 활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를 신뢰했고, 신념을 지키다 요절한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고한수’는 소설보다 긍정적으로 표현된다. 무엇보다 배우 이민호가 그 역할을 맡았다. 더불어 시즌1, 7장을 모두 할애하며 그가 야쿠자에 가담하게 된 서사와 함께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을 폭로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고한수는 일본인 부역자 야쿠자일지언정 시장에서 소상인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 백이삭은 고한수의 입을 통해 ‘몽상가’, ‘약한 놈’ 등으로 폄하된다. 백이삭은 평양의 부유한 양반가 자손이었던 반면, 고한수는 변방 제주도 출신의 지독한 가난을 겪은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양반 출신의 등장 인물들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가부장적 사고 방식을 고수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어리석은 인물(백이삭의 둘째 형 요셉) 또는 책으로만 세상을 접하는 온실 속의 화초(백이삭), 세상 물정에 문외한인 비주체적인 인물(요셉의 아내 경희)로 그려진다. 전쟁을 목표로 강제된 근대화의 물결 속에 전근대적 사고 방식이 공존하던 당시 조선의, 유교 사회의 모순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배 계급을 지켜주던 제도적인 울타리가 사라지자 그들은 그저 익명의 노동 인력으로 전락한다. 피지배계급에 속해 있던 고한수에게는 조선의 지배 계급이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별반 다르지 않은 권력자일 뿐이었고,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의 대립 또한 또다른 권력 다툼일 뿐이었다. 그를 배반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무력과 공포로 점하는 우위와 돈 뿐. 어쩌면 그에게는 식민지 종주국에서 살아가는 피지배계급 조선인으로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이나 신념, 대의를 위한 행동, 명예는 지나친 사치였을지도. 과연 우리는 고한수에게, 왜 이렇게까지 살아남았느냐고 말할 수 있을까? 선자와 그녀의 가족들은 모두 고한수의 능력으로 돌봄 받았고, 살아남았다.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인물로서 고한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 앞에 ‘선자’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 ‘선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 운동과 군대를 조직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 역사 앞에 마주 섰던 영웅들이 아니다. ‘선자’와 같이 떠밀려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 죽기 직전까지 일하지만 끊임없이 비극 속에 놓이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일구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민중에 대한 긍정이다.

※ 본 글은 “역사 앞에 ‘선자’들” 시리즈로 기획되었습니다. 「역사 앞에 ‘선자’들 2: 싸우는 여자들」로 이어집니다.

박민희 | 시각예술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 읽기에 흥미를 갖고 독립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