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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엉킨 마음 뒤집기: <옆으로 누운 말들> 전시 후기

함현영 최한화 2인전 <옆으로 누운 말들>
2023.04.04(화) – 04.18(화)
10:00-17:00 ※일요일 휴관
스튜디오126

#최한화

최한화의 작품들은 그늘에 있다. 무엇이든 실존하는 것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 우리들 삶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어느새 새까맣게 변해버린 바나나, 눅눅한 빨래, 막연한 두려움, 어떤 우울감. 하지만 그늘 속 시간은, 그림자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냥, 뭐랄까, 당연한 거다. 잠깐 멈추고,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고,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으려면 그늘에 있어야 한다.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호젓한 그늘.

▲ 최한화의 “해소되지 못한 말” 일부, 30.3×25.3cm, 2022 ⓒ박민희
“긁어 부스럼이 생길까 내뱉지 못한 말들을 끊임없이 가공시킨다.”(작가노트)

작가는 그의 그늘 속을 천천히, 꼼꼼하게 관찰했다. 특히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첫번째 작품이 인상깊다. 전시 제목 “옆으로 누운 말들”이 시인의 언어라면, “해소되지 못한 말”(2022)은 미술가의 언어다. 손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잇몸과 이가 났다. 그렇다면 이것은 손인가 입인가. “뱉어내지 못한 말꼬투리들”(배윤주의 시구)로 잠 못 이루는 밤에, 긁어 부스럼 만들게 될 말들은 손이랑 뒤엉켜 기형이 되어버렸다. 이럴 바에 그냥 긁어 버릴껄. 부스럼이 나은지, 뒤엉킨 마음이 나은지 누가 선뜻 말할 수 있을까. 작가는 액자틀 속에 “해소되지 못한 말”을 가둬놓았지만, 왜인지 언제라도 밖으로 흘러나와 살아 움직일 것 같다. 그것이 폭탄 돌리기가 될지, 해원상생이 될지 두고볼 일이다.

갈색으로 변해가는 바나나. 시들어 갈 때 가장 달고 맛있는 바나나. 가장 맛있는 순간과 부패하기 시작하는 순간이 한 끗 차이던가. 아마도 이 상태의 바나나가 작가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다가온 것 같다. “바나나는 시들어 갈 때 가장 달다” 시리즈는 총 세 점 전시되고 있었다. 그 중 돋보기를 활용한 작업이 눈길을 끈다. 현미경을 활용했는데, 어딘가 이상하다. 관찰하는 대상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돋보기 그 자체에 바나나가 있다. 그런데 그 그림자를 보니 바나나가 빛나고 있다. 현실에서 시들어 가는 바나나는, 그림자의 세계에서는 빛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바나나라는 형태에서 색을 분리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당도를 측정하는 상자도 만들었다. 실제로 당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시력이 좋아야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다. 

이 외에도 젖은 빨래, 습기 찬 컵, 너무 크게 보이는 세균들. 어쩌면 모두 불쾌한 것들이지만 최한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해학적으로 표현되었다. 작가는 나름의 길도 제시한다. “깨고, 뒤집기”라는 문자 언어와 그것이 시각화 된 작품을 통해 말한다. 형식을 깨고, 생각을 뒤집으면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색으로만 제작된 “화이트 큐브 WHITE CUBE”가 그것을 더욱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도 오답은 없다는, 인생의 법칙같은 것 말이다.

#함현영

함현영은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왔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실존하는 물질로서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외면이라면, 볼 수도 만질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 내면일 것이다. 기억, 감정, 생각 등 정신적인 영역이다. 밖으로 보여지는 것들은 언제나 안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안의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밖으로 표출된다는 사실이다.
함현영의 방식은 안의 것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마치 그 내면을 까뒤집은 것 같다. 추상적인 내면을 시각화하고 물질이라는 옷을 입혀 눈 앞에 펼친다. 과거의 기억과 부정적인 감정들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세밀하게 관찰, 재고, 수용, 긍정 됨과 동시에 작가의 바깥으로 빠져 나간다. 이렇게 물성을 갖게 된 내면의 기억, 감정들은 완전하게 독립된 개체로서 사회 속에 놓여지고, 관객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 맺기의 시작점이 된다.

“나에게 결핍으로 남아있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과 응어리들이 함축되어 작품으로 구현된다. 나의 욕망이 작업에 스며 들어있다. 펑 터질 것 같은 분노, 해결되지 않은 감정, 참았던 울음. 무수히 많은 욕망들은 이리저리 뒤엉킨 채 큰 덩어리가 되어 곧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표현된다.” 

– 함현영 작가노트 중에서, 2023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의 소통을 시작한 때(작가의 웹페이지에 따르면 2018년)부터, 그의 화두는 줄곧 어린 시절이다. 세상이 너무 크게 느껴졌을, 작고 여린 존재. 작가의 웹페이지에 들어가면 작품 활동들이 차곡차곡 잘 정리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2019년 목록에 게재되어 있는 “자소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상을 관람하게 될 불특정 관객을 향해 어린 시절의 사진과 일기장 낙서 등의 기록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소개한 후에 일부분을 조각내고 쌓아 올려 조형을 시도하는 13분 짜리 영상이다. 이 영상이 흥미로운 이유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작가’로 선언하는, 그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부터 현재까지 꽤 오랜시간 이어져 온 ‘열매 만들기’라는 큰 작업 줄기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선언은, 사회적 관계 속에 자신을 공공재로 내어놓는 과정이다. 작가는 세상 속에 자신을 까발리는 존재다. 아픈 과거도, 상처도, 기쁨도, 슬픔도, 일상도 몽땅 소재로서 까뒤집어 보여주는 존재다. 그것은 마치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 무대 아래의 수많은 사람들은 적당히 자신을 숨긴 채 존재할 수 있지만, 무대 위에 서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함현영은 2019년 “자소상”을 통해, 익명도 별명도 쓰지 않는 ‘함현영’이라는 작가로 바로 서는 의식을 치른 것이다. 이후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어두운 동굴 속을 탐방하고, “열매가 맺히는 곳”(캔버스 위에 유화, 2020)을 발견했다. “후미진 곳 마구 자란 열매”(작가노트), 초기의 열매들은 서로 뒤엉켜 있거나 무수한 돌기로 가득차 있다. 화려한 색과 형태들은 독성을 암시한다. 이후 2022년에 제작된 것들은 어딘가에 매달리거나 연결되어 있지 않고 독립적인 형태를 가진다. 열매 하나 하나는 괴상한 모습이지만 푹신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되었다. 기이하고 뾰족한 형태일지언정 실제 공격성은 사라졌다. 다양한 색과 형태를 조합하는 함현영 특유의 조형 감각이 돋보인다.

제주의 작가들을 활발하게 소개하고 있는 스튜디오126(제주시 관덕로 14-1, 대표 권주희)은 어느덧 제주도 시각예술 창작 산실로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특히 신진 작가들에게 활짝 문을 열어두는, 소중한 공간이다. 올 해에도 무려 17회의 전시가 예정되어 있고, <옆으로 누운 말들>은 그 중 두번째 전시다. 1층은 최한화의 작품으로, 2층은 함현영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해소되지 못한 말과 감정들, 애매 모호한 두려움과 우울감, 삶과 일상에 존재하는 그림자, 부정하고 싶은 과거를 긍정하고 그것을 조형 언어로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작가들은 전혀 다른 화법으로 각자의 삶을 긍정하고 있다. 이는 작가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나간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중요한 가치들을 일깨워주는 순기능도 있었다. 당시 많은 담론들이 쏟아졌지만 그 중에서도 뇌리에 남은 문장은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라는 구호다. 나는 이 문장이 참 좋았다.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 감수성을 환기하고,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독려하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만났던 20대, 30대 또래 동료 친구들은 종종 좀 더 유능하고 세련된 사람들과 활기찬 대도시의 삶을 동경 했고, 또 떠나갔다. 터무니없이 부조리한 일을 겪는 날에는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알고 있다. 어느 사회에나 나름의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럴때마다 질문해 본다. 편의를 위해 부조리와 타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자존을 내가 짓밟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는 사람은 소수자에게 좋은 환경인지…, 그런 날에는 나와의 채팅이 필요한 것이다.
최한화와 함현영이 각자의 방식으로 뒤엉킨 마음을 뒤집어 보여주기에, 나도 내 마음을 뒤집어 보고 싶은 용기를 얻었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긍정적인 환경이 될 수 있다. 

참고
함현영 작가 웹사이트
[제주일보] 제주 청년 예술가 내일을 얘기하다(4) 함현영 작가
스튜디오126 인스타그램

박민희 | 시각예술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 읽기에 흥미를 갖고 독립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