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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사람: 권준호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을 읽고 1

권준호의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안그라픽스, 2023) 서평

세상의 그늘을 좀 더 밝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말’하는 일이다. 아주 익숙한 일 같지만, 가장 어려운 일상의 실천이다. 갈등이 싫어서, 시간이 없어서, 체력이 부족해서, 나이가 어려서, 직책이 낮아서, 이해관계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서 등과 같은 수많은 이유로 입을 닫아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부조리한 일을 겪었을 때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결국 스스로를 병들게 하는 앙금을 품거나, 약자에게 화풀이하는 악순환이 얼마나 만연한 사회인가. 때문에 말하는 일이, 각자의 소중한 체력과 시간을 할애하고 갈등을 감수하며 ‘잘’ 말하는 일이 때로는 중요한 실천이 된다. 

권준호의 두번째 단행본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을 읽고, 대화를 잘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문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디자이너의 현장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 흥미진진하다.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관계하고 싶은 기관과 단체에 말 걸기를 시도하는 열정과 순수함이, 권한을 남용하는 프로젝트의 결정권자들에게 정중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단단한 마음이,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섬세함과 책임감이 그야말로 여과없이 솔직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다양한 프로젝트의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 “대표님, 사장님, 회장님, 부장님, 총괄님, 프로님, 관장님, 교수님, 디렉터님 그리고 최근에는 의장님까지”(59쪽) 대화를 시도하는 디자이너. 디자인의 목적은 결국 소통. 이미지를 만나는, 그 찰나의 시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좋은 디자인은 치열한 소통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관련 내용들은 목차의 ㄴ-ㄷ 중에서도 「대표님, 우리 대표님」 꼭지가 정점이었는데, 이러한 에피소드가 통쾌하다 못해 짜릿한 이유는 보편적 현실과의 거리감 때문일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거듭되는 ‘대표님의 지시 사항’을 무미건조하게 전달하던 담당자에게 그 대표님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아니, 디자이너님이 우리 대표님을 왜….” 끝을 맺지 못하고 흐리는 그의 말끝에는 감히 디자이너 따위(?)가 대표님을 독대하겠다는 요청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이 당돌한 디자이너의 요청을 전달했을 때 마주하게 될 문책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어차피 “대표님 지시 사항 전달드립니다”로 시작하는 메일에서 대표님 말씀을 서간으로 전달받느니, 직접 뵙고 그 의중을 파악하는 편이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에둘러 설득했으나, 그는 끝내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한 헛웃음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대표님 지시 사항’에 담겨 있는 그 깊은 의중을 끝내 파악하지 못한 나는 결국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지 못하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이라는 명칭에서부터 권력자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그들은 아마도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과 그에 따른 성과로 그 위치에 선 입지전적인 인물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 조직에서 가장 뛰어난 미적 감각을 지닌 사람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 그것은 수치로 계산될 수 있는 트렌드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동시대를 함께 향유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어떤 감수성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대표님의 결정을 무비판적으로 반영한 디자인이 시대착오적인 결과로 끝나버리는 안타까운 예는 수도 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 처참한 결과물에 대한 책임은 대표님이 아닌 디자이너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고, 그들은 해당 디자이너의 역량 부족을 탓하며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권준호,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 안그라픽스, 2023, 53~55쪽

적다 보니 책을 통째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인다. 관계자들과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끝내 소통할 수 없었던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이런 장면들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에 잠기게 한다. 우선 돈을 지불하는 갑과 그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을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점차 고도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돈을 지불한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의 시간까지 모두 자신의 시계에 맞추려 드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직책과 연식은 가장 높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린 아이처럼 감정을 배설하는 사람은 어떤가. 서로 존중과 배려가 아닌 자신만 존중받길 원하거나,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당최 가능한 일인가. 이런 와중에도 나름의 사정과 이유가 있으니, 저자와 같이 ‘당돌한 을’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 돈보다 자신의 작업물에 대한 책임감을, 디자이너로서의 자존을 선택하는 모습에 겸허해진다. 
그리고 성실함을 바탕에 두는 그의 실력.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하게 타고난 재능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학생 시절 이후 디자이너라는 목표를 정한 뒤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은, 삶을 마주하는 성실하고 열정적인 태도 그 자체로 본받을 만한 것들이었다. “작업의 수준은 작업의 양에 절대적으로 비례”한다는(93쪽, 그에게 영향을 미친) 생각과 인쇄소 사장님과 신뢰 관계를 쌓아가는 일상에서, 의뢰인과 소통하기 위해 작성하는 이메일에서 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역시 한 사람의 사회적 성취는, 그가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 10년의 발자취와 성취는, 고독하게 고군분투한 시간과 작업의 양에 비례한 결과라는 사실에 또 한번 겸허해진다. 그가 디자이너로서 자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이유이자, “자발적 을에서 벗어나”(154쪽) “건강한 협업”(133쪽)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다들 이렇게 살아, 사회 생활이 다 그래, 좋게 좋게 넘어가, 까칠하게 왜 그래, 적당히 하지 뭘… 셀 수 없는 타협과 외면 속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수많은 아쉬운 현실 속에서도 건강한 협업을 이뤄낸 사례들을 말해주고 있어서, 체념하거나 냉소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고 있어서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에는 어린시절부터 현재까지, 업무 현장을 벗어난 소소한 일상의 에피소드까지 말그대로 한 디자이너의 이모저모가 담겨 있다. 짧은 메모, 긴 글 분량도 다양하다. 그래서인지 글 싣는 순서도 단지 제목 첫음절의 자음 ㄱ, ㄴ, ㄷ 순이다. 두서 없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가독성을 높여 준다. 과거와 현재, 일상과 업무 현장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방식이 의식의 흐름처럼 자연스럽다. 제목만 보고 한 꼭지씩 골라 읽기에도 부담없고,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더라도 끝까지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힘은, 독자로 하여금 말하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독서를 마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책을 선물하며, 우리의 일상과 실천도 말해보자고 독려했다. 그 모습들이 모이면 우리사회가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고,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주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다고 희망할 수 있지 않을까.

※ 본 글은 「독립 기획자의 일상과 실천: 권준호 『디자이너의 일상과 실천』을 읽고 2」로 이어집니다. 더불어 자신의 일상과 실천을 말하고 싶은 분의 글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짧은 글, 익명의 글 모두 환영합니다.

박민희 | 시각예술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 읽기에 흥미를 갖고 독립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