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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용하는 것이다”: 박경훈 <4∙3기억투쟁 새김과 그림> 전시 후기

광주시립미술관 기획초대전
박경훈 <4∙3기억투쟁 새김과 그림>
2023.03.30 – 07.02

※ 본 글의 제목은 범현이 큐레이터의 전시 서문 「틈새와 놀이∙틈새와 저항」 마지막 문단에서 따왔다. 박경훈이 예술을 다루는 방식을 보여주는 한 문장이라고 생각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미술은 삶을 위해 있다. (…) 예술은 숭배할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다. 고단한 일상일수록 더더욱! 이것이야말로 작가 박경훈이 이번 전시에서 하고자 하는 말일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제주 미술계에 관계하기 시작한 때는 2015년이다. 22회 4∙3미술제 <얼음의 투명한 눈물>에 아키비스트로 참여한 이후 제주로 이주했다. 그로부터 현재까지, 그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제주에서 만난 박경훈은 이사장, 위원, 대표와 같은 고위 직책의 문화예술계 인사다. 4∙3과 관련된 전시 행사 출판 사업 등에서 항상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제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항상 사람들 속에서 계획과 전망을 제시하는 그의 모습은 추진력 강한 지도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 광주시립미술관에서 만난 박경훈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화가 박경훈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전시는 1980년대, 20대 시절의 판화로 시작한다. 이후 판화 작업은 휴지기와 다름없는데, 그가 다시 목판화를 시작한 것은 30여년이 지난 최근이다. 초기 판화들은 대부분 1987년부터 1990년도에 집중 제작되었고, 이 기간은 그가 동료들과 함께 만들고 운영했던 ‘그림패 보롬코지’ 활동 기간이기도 하다. 당시 작품 중 일부는 4∙3추모제 포스터로, 4∙3사적지순례자료집 표지 등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이후 ‘그림패 보롬코지’는 사진 장르 등을 포괄하는 ‘제주시각매체운동연구회’로 확대 재편되었고, 이는 1993년 발족하고 1994년 1회 4∙3미술제를 개최한 탐라미술인협의회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박경훈의 활동은 제주의 역사, 문화, 사회 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뻗어나갔고, 글쓰기와 출판 사업으로 넓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시각예술 작가로서의 활동은 축소된 셈이다. 하지만 광주시립미술관에서 4∙3 75주년을 맞아 기획한 본 전시를 통해, 미술가로서 판화가로서 그의 역량과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최근 제작한 판화 작품들은 묵직한 이야기들을 아주 간결한 장면으로 전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마치 책갈피처럼, 4∙3에 대한 고찰 지점들을 짚어주고 있다. 꼭 필요한 선들 만으로 구성된 명료한 화면들, 그 단순하게 요약된 표정 속에 복잡한 마음과 정서를 모두 담았다. 정말이지 칼 맛, 보는 맛, 읽는 맛이 있었다.

“옴팡밭” 앞에서는 한참을 서 있었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이, 옴팡밭의 시체더미 밑에서 꿈틀 거리며 일어나 이게 지옥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넋을 잃고 기어 나왔을 순이삼촌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것은 돌담과 돌담 밑으로 몰려드는 까마귀떼 뿐이지만, 이 한 장면은 4∙3의 수많은 장면들과 연결된다.

▲ (위)“옴팡밭”(한지에 목판, 72.5x198cm, 2023) 
    (아래) “불복산”(한지에 목판, 84.5×198.5cm.2023) ⓒ사진 박민희

1980년대 당시 제주대학교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있던 4∙3의 그림자를, 그는 땅과 연결하여 표현하고 있다. 작품 제목으로 “토민土民”과 “땅 지키기” 등이 다수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특히 한라산을 등에 업거나, 한라산 밑에 손발이 묶여 누워있는 사람의 형상이 눈길을 끈다. 작품 “삼대”는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 내용을 시사한다. 화염병을 던지며 민주/통일을 외치는 투사와 총을 들고 무장한 산사람 그리고 죽창 끝에 효수된 장두를 한 화폭에 담았다. 1987년과 1948년 그리고 1901년. 그 가운데 한 맺힌 어머니가, 마치 성인이나 부처의 광배와 같은 둥그런 빛과 함께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시체 앞에서 통곡하는 어머니, 죽창을 들고 포효하는 어머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밭을 일구는 어머니. 이는 그의 역사의식과 동시에 제주섬, 한라산, 이 땅을 지키고 살아내신 어머니들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 안타까움과 분노를 집약하여 보여 준다.

대체적으로 화폭의 아래쪽에 밀도를 높이거나 중요한 형상으로 무게 중심을 두어 안정감을 주는 구도가 특징적이다. 한 사람으로 상징된 제주 민중이 굉장히 단단하게 그 땅을 딛고 있는 느낌을 준다. 특히 1988년도에 제작된 한라산 연작이 상징적이다. 양팔을 활짝 벌린, 혹은 열어 젖힌, 등에 짊어진 그 만큼의 땅. 산 하나가 곧 섬인 제주 땅. 대를 이어 살아 온 땅에 대한 책임감은 숙명일까. 강인하고 결연한 표정과 몸짓으로 선언하고 있다. 

▲ “건국의 기초”(캔버스에 포토콜라주, 아크릴릭, 194×260cm, 2009/2022 재작업)

75년 전,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도민의 과반 이상이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를 무효로 만든 곳이 바로 제주다. 그 대가는 그 누구도 상상해보지 못한 잔인함으로, 무수한 주검으로 되돌아왔다. 제주의 모든 마을이, 모든 돌담이, 모든 숲이 기억하고 있는 학살은 바로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시작점이었다. 본 전시 도록의 첫 도판이 “건국의 기초”인 까닭일 것이다. 비매품으로 제작된 전시 도록은 전시와는 별도의 질서로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유익하여 4∙3 교육 자료로 활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대 이후 그는 포토콜라주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작품들은 대체로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고, 상징적이다. “건국의 기초”와 같이 태극기라는 상징과 유해발굴 현장의 모습을 오버랩하여 그 이면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든지, 관객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제주도 전토에 휘발유를 뿌리고 거기에 불을 놓아 30만 도민을 한꺼번에 태워 없애야 한다”는 문장을 읽게 하기 위해 무려 5미터의 대작을 만든다든지, 4∙3 당시 산사람을 확인하는 인식표로 사용된 “부러진 숟가락”과 4∙3 당시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얼굴을 화폭에 가득 담아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환생꽃-이덕구(2023)”는 4∙3을 기억하는 상징이 되어버린 동백꽃과 이덕구의 얼굴을 합성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백꽃 상징을 이덕구를 기억하는 상징으로 좀 더 심화시켜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관련 내용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호기심을 발동시켜 그 내용을 공부하게 하고, 그 내용을 아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명예 회복이 되지 못한 산사람들의 존재를 환기한다. ‘이덕구’라는 상징은 여전히 필요한 4∙3 진상규명운동의 과제이자, 분단과 이데올로기 극복이라는 한국 사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성조기를 전면에 등장시켜 다소 노골적으로 4∙3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림” 카테고리의 대부분은 4∙3미술제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을 리메이크 했다. 이를테면 포토 콜라주만으로 존재했던 작품에 아크릴 작업을 더해 질감을 만들거나, 2007년 “산전에서”라는 제목으로 설치했던 무쇠솥 등을 “환생꽃-이덕구”(2023) 신작 앞에 재설치하는 방식이다. 화가의 붓질과 색감을 덧입어 물성을 갖게된 작품들은, 이전과는 다른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은 전시와 도록에서 재작업 관련 정보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작품 제작 역사를 확인하는 데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록을 잘 남겨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본 글에서는 도록의 내용을 따랐으나, 작품에 표기된 제작년도를 우선시하여 적었다.(판화 작품에 제작년도가 2023으로 되어있으나, 작품 정보에는 2022년으로 표기된 것들이 다수 있었다.)

그의 판화와 회화는 사뭇 다른 정서를 갖고 있어, 이 차이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꼭 필요한 색과 선만 남기고 나머지는 덜어내는 방식으로 작업되는 판화와 캔버스 위에 이미지를 겹치고 물감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작업되는 회화의 차이다. 이 매체의 차이가 그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주로 흑백으로 표현된 판화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4∙3의 주요 장면들이 표현 되었고, 회화 작품에는 작가의 사회비판적 시선과 발언이 담겨 있다. 

그가 공개 발표한 작품 중 4∙3을 이야기하지 않은 작품이 없고, 그의 인생에서 4∙3과 관계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그는 4∙3에 귀속된 삶을 살았다. 세계 시민, 유목적인 삶, 기후 변화와 같은 단어들이 더 익숙한 세대에게는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땅에 대한 책임감, 대를 이어 살아 온 삶의 터전에 대한 감정은 사실,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작품을 통해 간접 체험하며 그 마음을 짐작하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뿐이다. 그 과정이 각자가 딛고 있는 땅을 돌아보고 그 땅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에 작은 불씨를 지필 수 있기를 바란다면, 너무 과분한 것일까.

그는 그의 작품 앞에서 통곡하는 삼춘들을 만난 이후, 예술관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한 사람으로서 예술가로서 작품을 통해 타인과 깊게 교감하고 현실 사회의 변화를 만드는 한복판에 존재했던 경험은 굉장히 특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기억투쟁은 예술의 몫이다. 감성의 울림, 미적 체험의 경험은 오랜시간 잔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술은,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사용될 때 특별한 빛을 발한다.

ⓒ광주시립미술관. 전시와 작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 영상을 링크한다.
링크한 영상은 전시 현장에서 상영되었다.

박민희 | 시각예술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와 역사 읽기에 흥미를 갖고 독립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